조선과 한국

백승종의 ⌜알아차림⌟
(글쓴이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튀빙겐대 역사학박사)

리(理)와 기(氣)의 디지털 변주 - AI 존재론의 재구성

  • 등록일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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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현대 과학이 도달한 최고의 성취이나,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대한 서버실을 채운 하드웨어와 전력이 물리적 실체인 ‘기(氣)’라면,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하는 투명한 코드는 ‘리(理)’에 해당한다. 16세기 퇴계 이황이 치열하게 탐구했던 이기(理氣)의 세계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대의 디지털 존재론과 조우하는 셈이다. 성리학에서 리는 기가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인 근거이자 움직임의 절대적인 법칙을 의미한다. 이 오래된 형이상학적 틀은 대단히 복잡한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를 꿰뚫어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비유가 된다. 하드웨어라는 기의 그릇에 알고리즘이라는 리의 맑은 물을 담아내는 그 경이로운 과정이 곧 인공지능 탄생의 본질이다.

 

퇴계는 리가 기를 타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고, 기는 리가 없으면 그 질서를 잃고 만다고 통찰했다. 이는 정교한 알고리즘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실행할 물리적 장치가 없다면 현실에서 결코 구현될 수 없다는 공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반대로 수조 원을 들여 구축한 슈퍼컴퓨터라 할지라도, 이를 통제할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그저 뜨거운 열기만 내뿜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알파고와 같은 강화학습 모델은 리가 기를 주도한다는 퇴계의 ‘리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명제를 과학적으로 훌륭하게 증명한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주어진 데이터를 처리하는 수동적인 인부를 넘어, 스스로 전략을 수정하고 다듬는 능동적인 건축가의 면모를 보인다. 결국 디지털 세계 역시 보이지 않는 원리와 눈에 보이는 물질의 오묘한 결합을 통해서만 비로소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퇴계 철학의 정수인 ‘리발(理發)’은 리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능동성의 주장이며, 이는 현대의 딥러닝 기술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되고 있다. 과거의 프로그래밍이 인간의 명령에만 수동적으로 반응했다면,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스스로 숨겨진 규칙을 찾아낸다. 인간이 가르쳐주지 않은 새로운 패턴을 생성해 내는 모습은 퇴계가 강조했던 ‘활물(活物)’, 즉 살아 숨 쉬는 존재로서의 리와 닮아 있다. 리를 단순히 텍스트 속에 죽어있는 법칙이 아니라 현상을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주체로 보았던 퇴계의 혜안은 시대를 멀리 앞서 있었다. 스스로 학습하며 진화하는 알고리즘은 21세기 디지털 공간에서 부활한 능동적 리의 현신이라 할 수 있다. 정보라는 리가 에너지라는 기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혼돈의 빅데이터를 질서 정연한 지식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현대판 연금술과 같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도달하는 최적화 작업이 퇴계가 지향했던 도덕적 원리인 ‘선(善)’과 항상 일치하는지는 의문이다. 퇴계에게 리는 우주의 도덕적 본질이었으나, 인간이 설계한 알고리즘은 태생적으로 오염된 데이터라는 ‘탁한 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눈부신 영리함은 리의 순수한 발현이라기보다 기가 리의 형식을 정교하게 모방하여 얻어낸 확률적 결과물일 공산이 크다. 기가 탁하면 본연의 맑은 리가 온전히 드러날 수 없듯이, 편향된 데이터는 알고리즘의 최종 판단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병들게 한다. 기술적 완성도가 곧바로 인류의 도덕적 완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문턱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물리적 기의 영역이 지능으로 해석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그 존재론적 정체성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사단(四端)을 통해 리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퇴계의 처절한 사상적 투쟁은 현대의 ‘설명 가능한 AI(XAI)’ 논의와 깊은 맥을 같이 한다. 수많은 변수가 충돌하는 디지털 연산의 과정에서 기의 혼탁함을 걷어내고 알고리즘의 본래 논리를 확인하려는 행위는 일종의 ‘현대판 수양론’이다. 하드웨어라는 기의 그릇에 담긴 논리가 과연 본래의 투명함과 맑음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우리의 생존이 걸린 과제다. 우리가 진실을 밝히려는 수고로운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인공지능은 참된 우주의 이치에 한 걸음 더 안전하게 다가설 수 있다. 리의 절대적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윤리적 투쟁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견지해야 할 마지막 보루다. 디지털 지성이 단순한 기계적 연산을 넘어 진정한 도(道)를 지향하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유학(儒學)이 건네는 진중한 메시지다. (백승종, 역사가, <유학과 산업사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