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한국

백승종의 ⌜알아차림⌟
(글쓴이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튀빙겐대 역사학박사)

인간은 무엇인가 – AI 시대 퇴계 선생의 질문

  • 등록일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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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연어 처리와 예측 알고리즘은 이미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여겨지던 판단과 창작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비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에 앞서, 인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유학 사상은 단순한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해석할 이론적 자산이 된다. 나는 유학의 지혜를 빌려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퇴계 이황의 사상은 이 혼란한 시기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성리학의 핵심 이론인 이기론(理氣論)은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놀랍도록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디지털 환경에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는 잠재력은 있으나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와 유사하다. 데이터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특정한 구조로 엮일 때 비로소 방향을 갖기 때문이다. 반면 알고리즘은 이러한 데이터를 정리하고 규칙을 부여하는 '()'의 역할에 대응된다. 그런데 기가 탁해지면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담지 못하듯, 편향된 데이터는 인공지능의 왜곡을 낳는다. 기술의 오류는 단순한 계산 실수가 아니라 존재론적 불균형에서 오는 문제다. 우리는 성리학적 분석을 통해 AI의 구조적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인공지능이 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지어내는 '환각 현상'도 성리학의 마음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올바른 이치()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운()이 제멋대로 발동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발라야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인식 과정에서 끊임없는 도덕적 성찰을 요구했다. AI의 신뢰성 문제는 기술만 고쳐서 해결할 수 없으며, 정보를 대하는 우리의 비판적 검증이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파고드는 자세다. 정보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검증하는 태도야말로 현대적 인식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 퇴계 이황이 강조한 '()'은 디지털 시대의 인간학적 토대가 된다. ''은 마음을 집중하고 깨어 있는 상태를 뜻하며, 흩어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내면의 질서 원리다. 쏟아지는 데이터 홍수 속에서 우리는 추천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대로 반응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 쉽다. 하지만 ''의 정신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깊이 생각한 뒤 주체적으로 판단한다. 이는 알고리즘에 종속되지 않고 인간의 자율성을 지키는 강력한 철학적 힘이다. ''은 단순한 수양을 넘어 디지털 데이터 너머의 진실을 꿰뚫어 보게 하는 힘이다.

 

기술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지 않기에 설계 단계부터 인간의 윤리적 고민이 들어가야 한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발(理發)'은 올바른 이치가 주도적으로 작용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뜻한다. 이를 현대적으로 풀면 인간이 세운 올바른 가치 기준이 알고리즘 설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발자는 기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창조물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는 현대 개발자의 윤리 강령이 되어야 마땅하다. 기술 교육이 인문학적 소양과 결합하여 도덕적 성찰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학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이며, 이는 서구 중심의 AI 윤리를 보완하는 중요한 대안이다. 서양의 윤리가 개인의 권리에 집중한다면, 유학은 '()''()'를 통해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의 윤리를 제시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알고리즘 설계의 최소한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평가받아야 한다. 돌봄 로봇이나 교육용 AI는 단순한 기능 수행을 넘어 인간 관계의 맥락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이것이 유학적 인간관을 기술 사회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길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인간의 존엄이 있다. 기계는 계산하고 패턴을 찾는 데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능력은 없다. 반면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고 고칠 수 있는 도덕적 존재이자 주체적인 결단자다. ''은 이러한 자기 반성 능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정신적 힘으로 작용한다. 인간다움은 계산 능력이 아니라 도덕적 각성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데이터 패턴으로만 환원하려는 시도에 맞서, 우리는 계산 불가능한 존엄성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리와 기, 경과 수기치인 같은 전통 개념들은 이제 알고리즘과 데이터 사회의 새로운 윤리가 된다. 퇴계의 가르침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디지털 문명의 혼란을 잠재울 성찰적 도구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의 존엄은 우리가 마음의 힘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지켜진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다. 마음의 등불을 켜고 기술의 바다를 건너는 지혜로운 선비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