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과 새것

한재훈의 ⌜들여다봄⌟
(글쓴이 성공회대학교 교수 / 고려대 철학박사)

반촌(頖村)에서 퇴계를 치제(致祭)하다

  • 등록일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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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제(致祭)는 왕실의 종친이나 대신 또는 국가적 업적을 남긴 종2품 이상의 문무공신 및 외방에서 공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특별히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하사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지내는 제사로, 사제(賜祭) 또는 유제(諭祭)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퇴계 선생에게는 여러 차례 치제가 내려졌는데, 그 대부분은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에 내려졌거나 간혹 가묘(家廟)에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1796년(정조 20) 서울 한복판에서 퇴계 선생을 위한 치제가 행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균관(成均館) 인근의 반촌(頖村 또는 泮村)에서 

 

  정조(正祖)는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신해박해라고도 함) 이후 정학(正學)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영남 지역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후손을 특별히 관직에 임용했고, 1792년에는 도산서원에 치제를 내리면서 도산별시(陶山別試)를 시행하게 했다. 1796년에도 정조는 영유 현령(永柔縣令) 추천 후보 중 3순위였던 이지순(李志淳, 1762~1807. 퇴계의 9세손)을 퇴계의 사손(祀孫,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낙점했다.

 

  영유 현령으로 부임한 이지순은 사손으로서 이황을 비롯한 조상의 사판(祠版, 신주(神主)를 대신하는 나무판자)을 임지인 영유현으로 모셔 와야 했다. 그리하여 경상도 예안에서 평안도 영유까지 퇴계의 사판을 모신 행차가 9월 4일부터 22일까지 19일 동안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 여정 중에 이황의 사판은 한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조는 전례가 없는 특별한 은전을 내렸다. 

 

  먼저 퇴계의 사판이 한강을 건너는 9월 13일 정조는 관리에게 성균관 관학생들을 이끌고 강가에 나가 지영(祗迎, 경건하게 맞이하는 의식)하게 했고, 이황의 사판이 머물게 될 성균관(成均館) 인근 반촌(頖村 또는 泮村)에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를 지내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는 규장각의 전현직 각신(閣臣)들과 초계문신(抄啓文臣)들까지 모두 나아가 참배하라고 하교했고, 정조 자신도 치제가 치러지는 시간에 월근문(月覲門)까지 직접 납시어 예를 표했다. 

 

  정조의 이와 같은 어명이 있었기에, 당시 치제에는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우의정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을 비롯한 전현직 관리와 사대부를 포함해 모두 741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는 당시 승지였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도 있었다. 또한 9월 14일 퇴계의 사판이 한양을 떠날 때도 좌의정 채제공은 수많은 관료를 인솔하고 남대문까지 배행(陪行)하였으며, 모화관(慕華館)에서는 성균관 관학생들이 지송(祗送)하는 의식을 행했다.

 

  1796년 9월 4일 예안을 출발한 퇴계의 사판은 9월 22일 영유에 도착했다. 영유 관아 동쪽 별채에 사판을 봉안하고 고유제까지 마친 이지순과 종친들은 음복(飮福)을 하면서 19일 동안의 여정을 회상했다. 이 자리에서 퇴계의 후손들은 임금으로부터 치제가 내려진 정조의 특별한 은전에 감격하면서 이번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그리고 이 여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이헌순(李獻淳, 1754~1833)은 당시 19일 동안의 여정과 사건 그리고 수많은 인물, 심지어 매일매일의 날씨와 에피소드까지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반촌치제시일기(頖村致祭時日記)』로 전한다. 

 

  『반촌치제시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실려 있다. 

 

  “반촌에 사는 사람들은 평소 술을 몽땅 마시고 취해서 고래고래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곳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경계하기를 ‘선생의 사판이 오늘 반중(泮中)에 머무시니, 예전처럼 취하여 망동을 부려서는 안 된다’면서, 밤새도록 술 마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반촌치제시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