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PIRIT
시대와 퇴계
- 심경호의 ⌜한결같음⌟
- (글쓴이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 교토대 한문학 박사)
퇴계 시대의 출판문화 - 주자와 퇴계의 ‘문자전(文字錢)’ 논란
- 등록일 2026-03-11
- 조회수 62

수년 전 중국 복건성의 건양과 무이의 주자 유적을 보고 돌아보다가 ‘마사진(麻沙鎭)’이라는 지명 표지를 보고 반가왔다. 인가도 없고 상가도 없는 텅빈 거리였지만, 그 부근은 민간 서적 출판의 중심지로 송나라 때부터 번성했던 곳이다. 세계 동양학에서는 마사본이라고 하면 오류가 많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주자는 마사의 서사(書肆)에서 낸 여조겸 문집에 오류가 있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 자신도 사서(四書) 주석서를 그곳의 서사에서 수차례 개간했다.
주자 시대에는 관판 서적의 판매가 활발했고, 마사를 중심으로 사설 서사도 발달했다. 주희는 임용중(林用中)에게 보낸 서한에서, 관아에서 서적을 발간하여 수입을 잡는 ‘문자전((文字錢)’은 허용하면서도, 학자가 장식(張栻)의 권유처럼 생계를 경영한다면 비루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회암집(晦庵集)』 별집 권3에 이 서한이 실려 있다. 장식은 부유한 집에서 성장해서 가난의 고초를 알지 못했으나 오히려 생계의 경영에 대해 논했지만, 주희의 경우 접대 경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경영의 비루함을 경계했다. 명나라 때 유서(근대 이전 백과사전)인 『경제유편(經濟類編)』 권49에 보면, 호굉(胡紘)이 건안으로 찾아오자 주자는 생활이 어려워 그에게 학생들 대접하듯이 탈속반(현미밥)을 권해야 했다. 이후 호굉은 심계조(沈繼祖)를 시켜 “나물 먹으며 마귀 섬기는 요술로 후진을 미혹시키고, 행실 없는 무리를 모아 당파를 만들며 형적 숨기는 짓이 귀신과 같다”라고 라고 주자를 무함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문자전’에 대한 논의는 퇴계가 1563년(명종 18) 이담(李湛)[자 중구(中久)]에게 답한 서찰에 처음 나온다. 당시 이담은 『주자대전』 관련 의문점을 문목(問目)으로 정리해서 보내왔다. 퇴계는 ‘문자전’ 관련 항목에서, “그 일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 아래 글에서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아마도 간행 서적을 판매하여 얻는 돈인 만큼, 주인이 될 사람을 택하여 관아에서 수령하는 것인 듯하다. [선생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서사를 설치하여 서책을 간행했다.]” 이담의 문목과 퇴계의 답변을 보면, 퇴계는 주자 당시의 서적 유통의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퇴계 당시에는 서적의 새로운 유통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뒷날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선비가 달리 생업이 없다고 해도 나무 심고 약 파는 일은 이득이 없다고 지적하고, 주자도 개인의 서적 간행 및 판매를 경고했다고 언급했다. 퇴계의 시대부터 이익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관판이 발달했다. 민간의 서사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발달상은 알 수가 없다. 관아나 서원의 서적 출판이 주류를 이루고, 일부 사찰도 심지어 유학 관련 서적을 판각하여 수입을 잡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별 저술이 출판을 통해 불특정의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각각의 저술은 그 체계나 지향, 개념 정의가 복수의 불특정 비평가들의 ‘검토’를 거치기 어려웠다. 서찰과 별지를 통해 학파 내부에서 그러한 검토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기는 하지만 퇴계는 『무이잡영』이나 『주자행장』 등 주자 관련의 각종 서적을 관아에서 출판하는 일에 깊숙이 간여했다. 주자학 및 퇴계학의 확산을 파악하려면 퇴계와 출판문화의 관련 사실을 시야에 두어야 할 것이다.
- 다음글
-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