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PIRIT
시대와 퇴계
- 심경호의 ⌜한결같음⌟
- (글쓴이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 교토대 한문학 박사)
퇴계, 文章으로 정치를 하다
- 등록일 2026-01-29
- 조회수 79

퇴계는 문장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근대 이전 지식인들이 익혀야 하는 가장 고난도의 문제인 법문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퇴계는 52세 되던 1552년 4월, 교리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올라가서 5월에 임시했다. 이후 대사성이 되었나, 11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상호군이 되었다. 1553년 4월에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나 7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부호군이 된 뒤 9월에는 상호군이 되었다. 이런 공적 활동에서 퇴계는 문장과 글로 자신의 뜻을 시대에 펼쳤다.
1553년(명종 8) 9월 14일 경복궁에 화재가 났다. 화재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1554년 초부터 조정은 궁궐 복구에 돌입했다. 정월 11일 대내와 동궁의 기초를 놓은 후, 4월에 흥경각, 6월에 동궁, 8월에 사정전·비현각·교태전·연생전·경성전·양심당·자미당, 그리고 9월에 강녕전을 재건했다. 11월 11일 종묘에 고하고 12월 13일 명종과 삼궁(三宮)이 이어(移御)했다. 당시 선수 도감은 공조판서 홍섬으로 하여금 『경복궁중신기』를 짓게 하고 건의했다. 이 『경복궁중신기』는 실제로 퇴계가 찬진했다.
경복궁 여러 전각의 중건 때 퇴계는 2편의 상량문을 문집에 남겼다. 「동궁자선당상량문(東宮資善堂上梁文)」과 「사정전상량문(思政殿上梁文)」이 그것이다. 상량문은 법문으로 짓고 중간의 육위송(六偉頌)은 ‘동서남북상하’의 각 글자를 운자로 사용하여 그 글자가 속하는 운문의 글자로 시를 지어야 한다. 더구나 건물의 영건이나 중건과 관련하여 그 건물의 가치와 영건의 의의를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으로, 조정의 부좌, 왕의 침전인 강녕전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지난날 세종의 집무처로, 1435년 세종이 이른 「자치통감훈의」의 다른 이름이 「사정전훈의」이다.
「동궁자선당상량문」에서 퇴계는 “황손이 시골에서 자라지 않아도 농사의 어려움과 관리들의 득실을 알 수 있기를 바라며, 학사들이 사약하고 그릇된 것으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경전의 내용을 토론하고 도상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동궁의 수학에 관해 무일(無逸)과 시강(侍講)의 지침을 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사정전상량문」의 육위송에서는 ‘성스러운 덕이 밝게 빛나 오래도록 이와 함께 하시고’, ‘비를 내리고 구름이 가는 듯 교화의 은택이 널리 미치며’, ‘팔조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계몽하시고’, ‘마음속으로 양덕(陽德)을 보전하시며’, ‘해와 달의 빛나는 광채를 만백성이 우러러 보게 되고’, ‘경전을 강론하는 유신들은 오히려 겸허함을 숭상하기를’ 기원했다. 국왕이 군주이자 스승이어야 한다는 『대학장구』 서문의 ‘군사(君師)’ 이념을 천명한 것이다.
철학자 퇴계를 넘어서, 정치인 퇴계를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문 규모를 확립하고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메우고자 고투했던 지식인’으로서의 퇴계를 좀 더 다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 보이기 위한 노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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